
김상진
| 조선일보 애틀랜타 주필 |
지난 1991년 미국의 조지 H. 부시 대통령은 걸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인기가 절정에 달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데 대해 미국이 파병하여 이라크를 완전 격파한 것이다.
이어 다음 해에는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부시 대통령은 재선에서 낙승(樂勝)을 기대했으나 마침 그 때 미국에서는 격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이에 대해 부시 대통령은 엄중한 긴축 재정으로 대처했으나 사태를 호전시키지 못하고 결국 낙선(落選)하고 말았다. 승리한 것은 빌 클린턴이었다. 그는 선거 구호로 지금도 유명한“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economy, stupid!)”를 내세워 부시를 꺾고 제42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 만큼 어느 나라에서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민생문제’라는 것이 다시금 증명된 셈이다.
국민들이 물가고(物價高)에 시달리고, 입에 풀 칠 하는 것도 힘들게 되면 그 원성(怨聲)이 바로 현 집권세력으로 몰린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철칙인 것 같다.
지금도 온 세계는 가파른 인플레이션과 경기 불황(디플레이션”deflation)으로 극심한 경제 침체상태에 점점 깊게 함입(陷入)되어가고 있다.
문제는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은 서로를 불러일으키는 사이좋은 두 악마와 같다는 데 있다.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마구 치솟으면 이에 따라 민간인들의 지출이 급속히 줄어들면서 전체적인 수요(需要)가 격감하니까 기업이 망하고 실업률(失業率)이 늘게 된다. 그런데 인플레이션을 낮추는 유일한 방법은 금리(金利)를 높이는 길 밖에 없다.
통화 긴축을 통해 우선 물가부터 잡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이다.
그래서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이번에 0.75% 인상라는 ‘거인 조치(giant step)’를 28년만에 단행했다. 그러나 이것이 속효(速效)를 나타내 주면 다행인데,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금리 인상으로 경기 불황 (디플레이션) 악화 현상을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더 많다는 것이다.
연준에서는 낙관론자들이 우세했는데 그들이 옳았던 것인지, 그렇지를 못한 것인지는 앞으로 두고 볼 수밖에 없는 사태가 되었다.
그런데 미국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단순한 응급수단에 관한 의견 차이를 넘어 이념(理念)상의 내부 분열로 나라 전체가 큰 타격을 입는 불상사가 나타나 국민들을 침통(沈痛)하게 만들고 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올해 한국 ‘국가경쟁력’을 63개국 중 27위로 평가했다.
지난해 23위에서 4계단 밀려난 것이다. IMD는 경제성과, 정부 효율성, 기업 효율성, 인프라 등 4대 부문 별로 계량. 설문 지표를 취합해 순위를 매긴다.
지난해와 비교해 올해 한국은 경제성과(18→22위),정부 효율성(34→36위), 기업 효율성(27→ 33위), 인프라(17→16위)로 나타났다.
최근까지 전 세계에서 10위권에 드는 GDP(국민총생산)를 자랑하던 한국으로서는 국가경쟁력이 63개국 중 중위권일 뿐더러 작년보다 상당히 후퇴했으니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문재인 정부 시절의 후진적 좌경사상에 입각한 기업 규제가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아 온 결과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특히 정부 정책의 경제 변화 적응도는 46위, 환경 법규의 경쟁력 저해도(沮害度)는 50위로 거의 밑바닥 수준으로 추락했다. 미래 경쟁력과 직결되는 공공. 민간 기술 개발 지원도도 38위에서 46위로 뚝 떨어졌다.
올해는 덴마크가 1위를 차지했고, 2위 스위스, 3위 싱가포르, 4위 스웨덴, 5위 홍콩 등이었다.
작년 7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한국을 개발도상국이 아닌 선진국으로 분류함으로써 한국은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격상되었는가 했는데 국가경쟁력 면에서는 문 정권 하에서 밑바닥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기재부는 이번 결과와 관련해 “새 정부 경제정책 방향을 통해 공공. 노동. 교육. 금융. 서비스의 5대 부문 구조 개혁과 민간 활력 제고(提高) 등 국가 경쟁력 향상 노력을 강도 높게 추진하겠다”고 다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윤석열 대통령 자신의 경제 철학이다.
사실 윤 대통령은 선거 기간 중만 하더라도 경제 문제에는 막연한 점이 많이 보였다.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경제적 이념에는 아무 탈이 없었으나 약간의 거리감이 있어 보였다. 그는 대선 때인 지난 3월 유세 중 “경제는 대통령이 살리는 게 아니다. 기업과 민간 부문이 정부보다 똑똑하다”며 “대통령이나 정부가 그저 멍청한 짓을 안 하고 정직하면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당시로는 윤 후보의 최대의 관심사는 정권교체뿐이었다. 그러나 그 후 한두 달 사이에 세계정세가 거의 180도 달라졌다. 그 전 까지는 윤 대통령 스스로 국가의 재정 건전성이 중요하다면서도 역대 최대 59조 원이나 되는 추경으로 임기를 시작하고, 사병 월급 200만원 약속 같은 것도 수시로 튀어나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으로서도 곧 사태의 변이(變異)를 통렬하게 깨달은 것 같다.
경기(景氣)가 하강하면 자동적으로 세수도 줄고 실업급여 등 지출은 늘게 되어 있는데 나라 곳간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다. 지금까지 문 정권에 의해 줄줄이 얽매어 있던 기업에 대한 규제를 조속히 푸는 문제도 아주 시급하다.
“윤 대통령은 최근에는 “거의 종일 경제 얘기 밖에 안 한다”고 한 측근은 밝혔다. “심지어 한 밤 중에도 참모들에게 전화로 경제 상황과 관련된 이런저런 문의를 해 와 우리도 늦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새 정부는 그 동안 여러 차례 당. 정부. 대통령실 연석회의를 열고 국가의 모든 시책에 앞서 새 정부의 경제정책 요강(要綱)을 최우선적으로 다음과 같이 확정 발표했다.
▲경제 운영 중심축을 정부에서 민간.기업.시장으로 전환한다.
▲공공.노동.교육.금융.서비스 등 5대 부문 구조 개혁.
▲과학기술산업 혁신, 인구 위기 대응 등 미래 구조 전환 대비.
▲취약계층 사회안전망 강화, 생산적 맞춤형 복지.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은 특히 경제 체질 개선을 주요 과제로 꼽으며 “당면한 경제 위기 상황을 이겨내고 물가 안정과 민생활력 회복, 생산성 향상을 통한 성장 잠재력 확충의 경제전쟁 대장정(大長征)이 시작됐다. 새 정부는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 윤석열 정부는 그야말로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