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해 서방 주요 국가들의 제재가 갈수록 거세지고 있지만, 유독 독일이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다음 날인 지난달 25일(현지 시각) 유럽연합(EU)은 곧장 유럽 금융시장 내 러시아 자산을 동결하고, 러시아에 대한 수출 통제를 결의했다. 러시아 전체 수출의 50% 가까이를 차지하는 원유와 천연가스 등 에너지 수입 중단 등도 논의 중이다.
EU를 탈퇴한 영국도 러시아 로씨야 은행을 비롯해 러시아 주요 은행들의 자산을 동결하고 영국 금융 시장에서 이들을 퇴출했으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측근 100여 명과 그들이 연계된 기관·기업을 거래 금지 등 제재 목록에 올렸다. 영국은 자국 수요의 8%를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8일 단계적으로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미국 또한 러시아산 원유와 천연가스, 석탄 수입을 금지한다고 밝혔으며 러시아를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반면, 전쟁이 시작된 지 2주가 넘었지만 독일의 대러 제재는 침공 첫날 러시아-독일을 잇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노르트스트림2에 대한 승인을 무기한 중단한다는 것뿐이다. 이달 초 독일은 우크라이나에 대전차 무기와 지대공미사일 등 살상용 무기를 제공하겠다고 했고, 연간 1000억 유로의 예산을 투입해 자국 국방력을 강화한다는 계획을 발표했지만 여전히 러시아 제재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에 대한 초고강도 제재로 밀착하는 가운데 EU 회원국 중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가장 높고 인구도 많은 독일이 미온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가디언과 폴리티코 등의 해외 언론 매체에 따르면 독일이 러시아에 대해 보다 강력한 제재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에너지 수입의 대부분을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7일 러시아산 가스 및 석유 수입을 금지해야한다는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요구를 거절하며 “러시아산 에너지 공급을 일부러 제재 대상에서 제외했다. 에너지 공급 분야에서 러시아와 기업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 우리 측의 결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럽에 난방·이동·전력·산업을 위한 에너지를 현재로서 어떤 다른 방식으로 확보할 수 없다”고 했다.
독일의 에너지공급업체 RWE 측은 러시아에서 천연가스 공급이 완전히 끊긴다면 “수주일 정도 짧은 시간 동안만 전력이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고 독일의 슈피겔이 보도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독일은 전기료가 2020년 기준 kWh당 26.17펜스(약 388원)로 세계에서 전기가 가장 비싼 나라다. 한국의 3배 이상이다. 전기 요금에 재생 에너지 부담금, 풍력 에너지 부담금 등이 붙어서 청구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이 끊기는 경우 전기료가 천정부지로 오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상황은 독일의 무모한 ‘탈원전’ 정책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탈원전 정책을 추구하며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높여 놓은 결과 러시아에 대한 제재 대열에서 이탈하게 됐다는 것이다.
독일은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탈원전을 내걸며 원자력 발전소를 점차적으로 폐쇄했다. 2011년 18기였던 독일 내 가동원전은 지난해 말 3곳으로 줄었다. 독일은 그대신 생산 전력의 50% 정도를 태양열과 풍력 등 재생 에너지로 대체했는데, 원전을 폐쇄하면서 채우지 못한 전체 발전량의 16%는 여전히 천연가스에서 얻고 있다. 2020년 기준 독일의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량은 563억㎥로, 이는 독일이 전력용으로 사용하는 전체 천연가스 사용량의 55%에 달한다. 가디언은 “독일의 탈원전은 잘못된 정보와 비합리적 책임 할당으로 발생한 불필요한 자해 행위”라며 “탈원전이 독일의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을 높였다”고 비판했다.
폴리티코는 “독일이 러시아의 전쟁 자금줄을 대는 것에 그치지 않고 푸틴 개인이 비자금을 마련하는 데도 일조한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는 유럽에 대한 에너지 지원을 끊을 수 있다는 협박을 매일같이 하고 있다. 알렉산드르 노바크 러시아 부총리 겸 에너지장관은 7일 미국과 영국이 러시아 원유에 대한 수입을 금지한 데 대해 “러시아 석유를 거부하는 것은 세계 시장에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우리는 노르트스트림1 가스관을 통한 가스 공급을 금지할 권리가 있다”며 유럽으로 이어진 가스관을 폐쇄할 수 있다고 했다.
김수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