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길가
시인:理石 육근철
여보게
어딜 가시나
손 흔드는
구절초
시월이다.
벌개미취 지고 나니 여기저기 구절초 웃고 있다. 신이 절로 난다. 길을 걸어도, 차를 몰고 달려도 연분홍 구절초 꽃이 군락을 이루어 손짓 해주는 걸 보면 웃음꽃이 저절로 피어난다.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단아한 여인네가 하얀 행주치마 앞에 두르고 어서 오라 손짓하는 것 같아 행복하다. 그래서 시월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다. 산기슭에 작은 군락을 이루어 피는 구절초는 옥황상제를 모시던 선녀가 내려와 앉은 꽃이란다. 그래서일까? 구절초 꽃을 보면 올여름 폭염에 지쳤던 심신에 생기가 난다. 중양절 풍습에는 국화전을 부치고, 국화차를 마시며 시를 읊는 풍습이 있었다. 넉줄시가 절로 나올 것 같은 이 가을에 산기슭 풀밭에 핀 구절초를 보면서 시 한 수 읊어보면 어떨까?
회상(回想)//은비녀/그리운 얼굴/구절초/마디마디
내 고향 모래재는 이름 그대로 모래가 많은 시골 동네다. 산 넘어 신촌 뜰 포도밭에 가려면 고개 넘어 외길을 가야 했다. 그 길가에 시월이면 영낙없이 피는 꽃이 바로 구절초 꽃이다. 저녁 무렵 산길에 피어있는 연보랏빛 구절초는 웬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늘 콩밭에 묻혀 일만 하시던 할머니의 슬픈 은비녀처럼. 등이 굽어 슬픈 모습, 무릎이 아파 띠뚱띠뚱 걸으시던 할머니가 모랫길 언덕을 넘기란 무척 힘들었으리라. 그러나 어린 내가 그 심정을 알았을 리 없다. 폴짝폴짝 뛰어가며 “할머니 빨리 와.” 하고 소리치면 할머니는 상기된 얼굴로 “어여 먼저 가.” 하고 손짓을 하였다. 붓도랑 길가에 얼비친 구절초 그림자처럼. 아직도 뒤따라 오실 것 같은 꼬부랑 할머니의 팔자걸음. 발가락이 닮았네, 솟아오른 발등이 닮았네. 끊어 질듯 이어지는 갈바람 소리에 구절초 하얀 꽃이 손짓을 한다. 할머니의 쪽진머리 하얀 머리칼처럼. “어여 먼저 가.”...... 이제는 내가 일곱 살 손녀 서현이에게 하는 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