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연방검찰의 공소장서 확인
‘미국 법정에 선 최초의 북한 스파이'인 문철명(55)이 싱가포르에서 대량의 주류를 구입해 북한에 보냈던 것으로 25일 확인됐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음주를 즐기는 위스키·코냑 애호가란 점을 고려하면, 문의 주된 임무가 김정은 일가를 위한 사치품 조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군의 공작기관 정찰총국 소속으로 10여년간 싱가포르·말레이시아에서 활동한 문은 2019년 말레이시아에서 체포돼 최근 미국에 넘겨졌다. 미 연방검찰은 그를 대북 제재 회피를 위한 돈세탁 혐의로 기소한 상태다.
본지가 입수한 미 연방검찰의 공소장에 따르면 문은 싱가포르의 3개 회사에서 여러 차례 대량의 주류를 구입해 북한에 보냈다. 2016년 9월 그는 싱가포르의 한 회사에 술 604병을 주문하고 10만3186달러(약 1억1700만원)를 지불했다. 이때 구입한 술에는 프랑스산 고급 코냑인 ‘레미 마르탱'과 스카치 위스키인 ‘시바스 리갈' ‘조니 워커 블랙' ‘조니 워커 골드' 등이 섞여 있었다고 미 검찰은 밝혔다. 한 달 뒤인 2016년 10월에도 문은 이 회사에서 술 571병을 사고 대금으로 9만6270달러(약 1억900만원)를 지불했다. 북한 주민들은 빈곤 속에 사는데 매달 1억원어치 이상의 고급 술을 사들인 셈이다.
또 2014년 11월 문은 싱가포르 회사에서 한 병당 6.5달러를 주고 맥주 2178병을 구입해 북한 남포항으로 보냈다. 2018년 2월에는 400병의 위스키와 와인을 사서 북한에 보냈는데, 그 대금만 8만6000달러(약 9700만원)였다. 공소장에는 구체적 거래 내역은 없지만 문이 싱가포르 회사들에 수만 달러를 반복해 송금한 기록들도 나온다. 외국의 코냑·위스키·와인이 정기적으로 북한에 공급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술 외에 담배나 다른 사치품도 북한으로 밀수됐다. 2014년 9월 문은 싱가포르의 한 회사에 ‘미국 모 회사가 생산한 보트 엔진과 부품을 사고 싶다'고 부탁했다. 보트 엔진은 무기 제조에 전용될 수 있어 미국이 수출을 통제하는 품목이다. 싱가포르 회사는 보트 엔진 10개와 다른 부품을 26만달러(약 2억9000만원)에 팔았다. 2017년 12월엔 태국에서 담배 원료인 ‘각초(cut rag tobacco)’를 사들인 정황도 있다.
북한은 미국의 금융제재로 미국 금융기관을 통한 달러 송금이나 결제를 할 수 없다. 유엔 대북 제재에 의해 고급 술 등 사치품 거래도 막혀 있다. 하지만 북한은 중국과 싱가포르에 ‘유령회사’를 만들고, 중국·싱가포르·베트남·러시아 등 다양한 국가의 회사들과 거래했다. 중국 회사인 ‘다롄 선문스타 국제물류무역’과 그 싱가포르 자회사인 ‘신에스엠에스(SINSMS)’가 주요 공모자였다.
워싱턴=김진명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