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은 다시 돌아왔다. (America is back.)”
바이든 새 대통령은 지난 1월20일 취임식을 가진 후, 중요 연설을 통해 여러번 이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뜻하는 것은 미국이 또 다시 과거의 세계 지도자의 자리로 되돌아 왔다는 것으로 생각된다. 미국은 세계 공동의 가치, 즉 자유 민주주의와 인간의 기본적 인권 옹호를 위해 세계 여러 나라와 맺은 혈맹의 대열로 다시 복귀했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 아니겠는냐는 것이다.
필자는 이 말을 듣고 무한한 감명이 치솟아 오르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미국과 한국은 6.25 전쟁을 통해 피를 흘리며 서로를 지킨 혈맹 중의 혈맹이다. 그런데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를 전혀 인정하지 않거나, 일부러 노골적으로 한국을 비하(卑下)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미국이 왜 한국에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면서, 천문학적인 돈이나 내 놓지 않으면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수 없이 으름장을 놓았다.
도대체 적화통일을 지상 목표로 하고 있는 북한의 김정은을 “사랑한다”고 되뇌고 있으니, 6.25 때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긴 필자는 그 동안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모른다.
작년 10월에 만 90세가 된 필자는 6.25의 참극(慘劇)을 몸소 겪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필자는 만 19세였다. 처음에는 도망 갈 겨를도 없이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고, 국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총 후퇴를 했기 때문에 필자는 가족과 함께 꼭꼭 숨어서 지냈다.
그러다가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서울이 탈환되었다가 다시 중공군 개입으로 1.4후퇴할 때 국민방위군으로 편입되어 통영(統營)까지 강행군 후퇴를 했다. 도중에 수 없이 많은 국민병들이 고난을 못 이겨 낙오자가 되었지만 필자는 마지막 며칠 동안에는 걷지를 못해 거짓 말 보태지 않고 손발로 기어서 목적지에 도달했다. 거기에서 필자는 통역장교 시험에 합격해서 수 주일의 훈련을 받은 후에 육군 중위로 임관되고 최전방인 수도사단 기갑(機甲)연대에 배속되었다.
연대장 육근수 대령은 필자를 몹시 반겨 주었다. 이따금씩 마주치는 송요찬 수도사단장은 나만 보면 ‘쑈리(shortie)’라며 친밀감을 표시해 주셨다. 연대에는 미군 깁슨 중령이 군사고문관으로 배속되어 있었다. 그래서 육 대령과 깁슨 중령, 그리고 필자 세 사람이 항상 같은 짚 차에 함께 타고 다녔다.
당시는 중공군이 아군 정면에 배진(配陣)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엄청난 량의 집중 포탄을 퍼 부었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돌격해 왔다. 그런데 하루는 깁슨 중령이 상부에서 무슨 지시를 받았는지, 자기 스스로 최전방의 중공군 진지 바로 코앞까지 접근해서 실태 조사를 하고 오겠다고 나섰다. 그래서 그와 필자, 그리고 극소수의 호위병이 일행이 되어 험난한 산길을 뚫고 최전방까지 밀행(密行)해 들어갔다. 그야말로 중공군이 밥 먹는 젓가락 소리가 들릴 정도까지 가깝게 접근했다가 되돌아가는 길에 큰 탈이 났다. 깁슨 중령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더 이상은 한 발작도 걸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유난히 등치가 큰 그는“다 들 돌아가라. 나는 죽으면 죽었지 이 이상은 못 걷겠다”는 것이 아닌가? 날은 어두워지고, 언제 중공군 수색병들이 나타날 지도 모르는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 때 나는 체격이 왜소한 편이었으나 “나에게 업혀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싫어하는 그를 필사적인 힘을 다 내어 업고 걷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이가 거인을 업은 듯이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 까, 좀 안전한 지역까지 빠져나오자 그를 등에서 내렸다.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전쟁이 끝나면 꼭 미국의 내 고향으로 찾아와 달라, 이 은혜를 꼭 갚겠다”고 간청했다.
그러고 며칠이 지난 후 나에게 특명이 내렸다. 당시 서울에 있던 미 8군 사령부에서 테일러 사령관이 기갑연대의 현황을 직접 듣고 싶어 하니 갔다 오라는 것이다.
“왜 내가 혼자 가야 하느냐, 연대 작전참모라도 같이 가야지, 내가 무슨 전황 설명을 할 수 있겠느냐”고 항의했더니, 무조건 가보라는 것이었다.
영문을 모르나 상명이니 어쩔 수 없이 필자는 단독으로 짚 차에 올라탔다. 운전병이 말하기를 “이 차는 일본에서 재생(再生)작업을 하고 최근에 배급받은 차”라고 한다.
그런데 웬걸, 강원도의 유명한 산비탈 내리막 구불길을 내려가다가 갑자기 브레이크가 터져버렸다. 차는 쏜 살 같이 내려가는데 속수무책이었다. 드디어 운전병은 차를 길 가 언덕에 처박고 말았다. 그 차는 톱(지붕)이 없는 무개차(無蓋車)였음으로 필자는 그 충격으로 좌석에서 붕 떠 공중을 비행하다가 길 옆 깊은 낭떠러지에 떨어져 기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필자는 곧 의식을 회복했고, 몸을 살펴보니 오른 팔꿈치에 상당히 심한 타박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결국 8군 사령관 면회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요즘 생각하니 아마도 깁슨 중령이 나에 대한 고마움을 사령부에 보고해, 테일러 장군까지 “어떤 사람인지 한번 보자”고 하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가로 늦게 들기도 한다.
그러고 얼마간 시간이 흘러 깁슨 중령은 미국으로 돌아가고 로버지 소령이 후임으로 왔다.
어느 날 육근수 연대장이 갑자기 나를 부르더니 “여기 신문을 보니 김 중위는 휴가를 갔다 와야 한다고 되어 있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하루에도 수십 명의 신품(新品)소위들이 후방에서 도착하자 줄 지어 전사(戰死)하는 판국에 휴가라니, 너무나 기상천외(奇想天外)한 명령이어서 어안이 벙벙했으나 하명이니 어쩌겠느냐고 다른 분들에 대한 미안함을 억지로 감추고 약 10일간의 휴가를 떠났다.
그런데 웬일인가? 바로 그 사이에 당시 휴전 직전의 긴박한 상황에서 중공군이 최후의 대공격을 개시해, 육근수 연대장과 로버지 소령, 그리고 내 대신에 임시 통역장교 역을 맡았던 소위 등 세 사람이 모두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며칠 후에 연대에 되돌아가니, 사람들이 나의 손을 붙들고 “김 중위는 백 년을 살 사람”이라고 혀를 차며 기특해 했다.
그후 세월이 많이 흘러 나는 거의 태생적인 미국인 우호가(友好家)의 한 사람으로 미국에 건너 왔다. 이상과 같은 필자의 경험은 다른 더 많은 사람들에 비하면 사소한 일들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사소한, 그러나 개인에게는 너무나 귀중한 체험들이 쌓여 혈맹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아쉽게도 미국에는 아직도 트럼프와 같은 역사에 무지(無知)한 혐한 정서(嫌韓 情緖) 미국인이 더러 있음을 개탄해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