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에서 성찬식(Eucharist)은 신부로부터 밀떡과 포도주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기리는 의식으로, 이 영성체(領聖體·communion)을 통해 신(神)과 교회, 신자는 서로 하나가 된다. 그런데 이 중요한 의식에 가톨릭 신자인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참여하는 문제를 놓고, 미국 가톨릭 지도부가 반으로 쪼개졌다.
바이든은 존 F 케네디 이후 미 역사상 두 번째 가톨릭 신자 대통령이다. 지난달 24일 일요일엔 대통령 취임 후 처음으로 워싱턴 DC의 조지타운 지역에 있는 홀리 트리니티 가톨릭 성당을 찾았다. 여느 신자처럼 케빈 길스피 주임신부 앞으로 나아가 떡과 포도주 잔을 받았고, 신(神)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는 유세 연설에서도 성(聖)어거스틴의 글이나 구약(舊約)성경 시편을 자주 인용하며, 스스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임을 자처한다. 그가 앞으로 정례적으로 미사에 참석할 이 성당이 속한 워싱턴 DC 대교구의 윌턴 그레고리 추기경도 바이든을 환영했다.
그러나 그가 만약 포토맥 강 건너편의 알링턴 교구에 속한 성당에 갔더라면, 성찬식을 거부당했을 수도 있다. 알링턴 교구는 바실리카 오브 세인트 메리, 세인트 캐서린 오브 시에나 성당과 같이 가톨릭 보수주의자들의 거점이고, 바이든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는 위배되게 여성의 임신중절(낙태) 권한 확대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보수적 주교들 “동성애, 낙태권 확대하며 ‘독실한 신자’ 행세 말라”
미 월간지 애틀랜틱 몬슬리는 21일 “미국 정가에 죄인들은 넘쳐 나지만, 미국 가톨릭 지도자들은 교회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고 가톨릭 신앙을 정면으로 어긴 가장 유명한 죄인인 바이든을 신(神)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이루는 성찬식에 초청할 것이냐를 놓고 의견이 갈린다”고 보도했다. 바이든에겐 다행스럽게도 홀리 트리니티 가톨릭 성당의 길스피 주임신부는 “성찬식 참석이 신자에게 당근이나 채찍으로 쓰여선 안 된다”며 “신(神)과 만나는 이 순간을 통해 대통령의 신앙이 높아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홀리 트리니티 가톨릭 성당은 바이든 대통령의 성찬식 참석 이후 100여 통의 분노 전화와 편지, 이메일을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들로부터 받았다.
◇트럼프는 ‘보수적' 가톨릭 신자로 대법원, 행정부 채워
현재 미국 가톨릭 신자들의 정치 성향은 공화·민주당으로 비슷하게 나뉜다. 트럼프 행정부에선 윌리엄 바 법무장관, 팻 치폴로니 백악관 법률고문, 믹 멀베이니 비서실장 등이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연방대법관 9 명 중에선 무려 7명이 가톨릭 신자로, 존 로버츠 대법원장부터 트럼프가 마지막으로 지명한 애미 코니 배럿까지 6명이 ‘보수’ 성향이다. 나머지 1명은 ‘진보’ 성향의 소냐 소토마이어 대법관이다.
보수주의적인 가톨릭계에선 동성애와 낙태권리 확대를 지지하는 바이든은 가톨릭 교회와는 완전히 어긋나는 것으로 본다. 보수적인 캔사스시티의 조지프 노먼 대주교는 지난 13일 ‘가톨릭 월드 리포트’ 인터뷰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 행세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며 “아무리 대통령이라 해도, 가톨릭의 도덕적 가르침을 멋대로 정의(定義)할 수는 없다”고 비판했다.
◇바이든 지지 주교들 “정책이 다르다고, 성찬식을 무기화해선 안 돼”
바이든은 2019년 11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플로렌스 대선 유세 때엔 그 지역의 성당 미사에 참석했지만 성찬식은 거부당했다. 당시 로버트 몰리 주임 신부는 “영성체는 신과 신자, 교회가 서로 하나되는 것인데, 어떻게 낙태를 지지해 자신을 교회 밖에 둔 공인(公人)이 이 의식에 참여할 수 있느냐”며 막았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기후변화 특사인 존 케리 전 국무장관도 2004년 민주당 후보 시절에 낙태권을 지지한 ‘죄’로 선거유세 중에 여러 교구에서 성찬식 참석이 거부됐다.
그런가 하면, 샌디에이고의 주교인 로버트 매켄로이는 지난 2일 바이든과 같은 선출직 가톨릭 신자들에게 낙태와 같은 이슈에서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성찬식을 무기화해선 안 된다”고 반박했다. 미국 주교회의 의장인 로스엔젤레스 대주교인 호세 고메즈는 지난달 20일 바이든의 대통령 취임에 맞춰 “바이든의 신앙심은 영감을 준다”면서도 낙태권한 확대에 대해선 “악을 증진한다”고 비판하는 애매한 성명을 냈다.
이철민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