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숙명
시인: 理石 육근철
꽃무릇
붉게 핀 사랑
언제 우리
만날까
우리네 삶에는 꽃무릇에 얽힌 스님과 여인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것들이 있다. 이룰 수 없는 사랑, 지상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잎과 꽃의 애달픈 사랑 이 야기가 전해지는 꽃. 절에 공양드리러 온 처자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젊은 스님의 마음은 병이 들었다 한다. 이름도 모르는 그 처자를 잊을 수 없는 스님은 깊은 병이 되어 죽음을 맞게 되었다. 그 자리에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는 꽃무릇이 불꽃놀이 하 듯 아름답게 피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러나 절에서 꽃무릇을 키우게 된 배경은 매우 다르다. 절 지붕의 단청에 색을 칠할 때 꽃무릇 구근(球根)을 잘게 빻아 전분으 로 만들어 단청을 칠하면 방부제 역할을 한다. 또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퇴색되지 않 기 때문에 일부러 심어 길렀다 한다.
꽃무릇//한바탕/놀다간 자리/초록 바람/겨울 향
향기도 없고, 열매도 맺지 못하는 꽃무릇은 화려하고 교태스럽기 이를 데 없는 꽃이 다. 마치 여인의 속눈썹처럼 또는 립스틱 칠한 여인의 입술처럼 색정적이다. 초가을 무렵 선운사나 불갑사 절에 가면 꽃무릇 천지라 또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행락객들에게는 즐거울지 모르지만 수행하는 스님들에게는 방해가 되지 않을 까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수행이란 유혹의 언덕을 넘어가야 도달할 수 있 는 깨달음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불가(佛家)에서는 꽃무릇을 피안화(彼岸花)라 하여 저승꽃이라 부르기도 한다. 강 건너 기슭, 저 피안의 언덕에서 피는 꽃. 사바세계의 저쪽, 저 언덕 넘어 정토(淨土)의 세상에 피는 꽃이기 때문이다. 한겨울 하얀 눈을 뒤 집어쓰고 파란 잎으로 살아가는 꽃무릇. 가을 화려한 꽃잎에만 시선을 주지 말고 한 겨울 홀로 푸르러 청청하게 겨울을 나는 꽃무릇. 푸른 잎에도 의미를 두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