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노이 미. 북 회담이 결렬되었는데도 문재인 정권은 더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이제야 말로 ‘중재자(仲裁者)’인 한국이 나설 때라고 열을 올리고 있다.
문 대통령은 회담 결렬 다음 날인 3.1절 기념사에서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재개를 미국과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는 4일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체회의를 소집하고 “지난 해 남북간에 합의된 남북 협력 사업들을 속도감 있게 준비해주기 바란다”고 지시했다.
비록 미. 북 회담이 결렬되었지만 이 때야 말로 한국이 북한과의 경제 협력을 되살림으로써 북한을 붙들고, 미국도 회담에 돌아오도록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한국의 돌출 행위가 알려지자 미국 측은 당장 큰 불쾌감을 드러냈다.
AP, 블룸버그 등은 “문 대통령이 지나치게 북한 편을 든다”면서 트럼프 대통령과 문 대통령의 ‘결별설(訣別說)’까지 보도했다.
미국은 북한이 영변 핵 시설 뿐 아니라 “다른 모든 핵 시설과 생화학무기, 탄도미사일을 모두 폐기하기 전에는 제재를 풀 수 없다”고 재삼 다짐하고 있다.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은 5일 “선박 간 환적(換積)을 못하도록 옥죄는 등 북한을 더 압박하는 방안을 관계국들과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야말로 마지막 남은 가장 확실한 비핵화 강요 수단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터이다. 그런데 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한국이 나서서 무너뜨리려 한다고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전 주한 미국 대사는 “한국이 좀 진정하고(cool down) 속도를 줄여야(go slow) 한다. 미국이 제재 예외 조치를 인정할 준비가 되기 전까지 미국을 압박(push)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사태는 북한이 지난 6일 그들의 속내를 드러내는, 이를테면 가면을 벗어버리는 내용의 언론 보도를 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양상으로 일변(一變)하고 말았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래 침묵을 지키고 있던 북한이 6일만에 조선신보 보도를 통해 그들의 속마음을 백일하(白日下)에 드러낸 것이다.
조선신보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의 기관지이지만 평양의 통제 아래 있기는 마찬가지이며, 북한의 속마음을 비공식적으로 전달하는 일에 종종 활용되고 있다.
조선신보는 이번 미. 북 회담을 “핵 보유국끼리의 대등한 입장에서 임한 평화 담판의 판”이라고 규정하고 “이 평화 담판의 판을 깨는 미국의 강압적이고 무례한 패권적 발상이 문제”라고 미국을 비난했다.
“조선은 미국의 핵전쟁 위협에 대한 억제력으로 핵과 탄도 로켓을 개발했다…조선은 미국 본토에 대한 핵 보복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미국과의 평화담판에 당당히 임하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제재 해제’나 ‘경제 지원’을 미끼로 조선의 핵과 탄도 로켓의 포기를 끌어내겠다는 주장은 조미 핵 대결의 역사적 경위를 무시한 허언”이라는 것이다.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 해제 문제를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정면으로 평가절하하고 만 것이다.
“제재 해제는 미국의 관계 개선 의지와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을 가늠하는 시금석”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말 들을 다시 풀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미. 북 회담의 목적은 ‘북한의 비핵화’가 아니라 ‘북한과 미국의 두 핵 보유국끼리의 군축회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한. 미 동맹에 의한 핵우산 제공도 취소하며 태평양 상의 북한을 위협하는 핵무기를 제거하지 않는 한 북한만이 단독으로 핵을 폐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미국은 북한이 핵을 폐기하면 그 대가로 경제 제재를 해제하고 경제 지원을 해 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은 제재 해제나 경제 지원 같은 것을 바라고 핵을 절대로 포기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미국의 핵 능력이 한반도에서 사라진 후에라야 핵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은 영변 핵 시설 폐기와 제재 일부 해제를 맞바꿀 수 있다고 선의(善意) 표시를 했는데 미국의 강경파는 이를 악용해 ‘경제적 곤경에 처한 조선’이라는 허상을 만들어 냈다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핵 협상 교착의 장기화가 미국에 유리하다는 궤변을 일삼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신보는 “트럼프 대통령이 비핵화의 기회를 영영 놓치고 ‘미국 제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의 체면이 손상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조선이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전에 조미 신뢰 조성을 위한 동시행동의 첫 단계 공정을 바로 정하고 그 실천 준비를 다그쳐야 할 것”이라고 위협적 권고를 하기도 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김정은의 새로운 베팅(betting)을 읽을 수가 있다.
미국은 자꾸만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미국 등의 지원에 힘입어 무한한 잠재력을 활용해서 위대한 경제 강국이 될 것이라고 꾀고 있다. 그러나 김정은이 바라고 있는 것은 제재 해제도, 경제 강국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와서는 미국이나 유엔이 경제 제재를 해제해도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 한국에서의 미군 철수라는 것이다.
결국 북한의 핵 폐기는 벌써 물 건너갔다는 얘기가 된다. 북한은 미국이 스스로의 한반도 비핵화 즉 미군 철수와 한미 동맹 파기를 하지 않는 한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미국이 “아 그렇습니까?”하고 고분고분 북한의 요구대로 한국을 버리고 떠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미군이 떠난다 해도 미군이 사라진 한반도에서 북한이 지금까지 잘 감추어 갖고 있던 핵을 고지식하게 완전히 폐기할 리도 만무(萬無)하다.
결국 쌍방 대타협에 의한 북한 핵 폐기는 현재 상태로는 전혀 실현 불가능한 허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은 길은 오직 한 가지, 군사 옵션을 고려하거나, 미국을 비롯한 온 세계가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를 최고 강도로 장기간 지속해 나가는 길 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도 정신 차려야 한다. 문 정권이 남북 경제 협력을 고집하는 한 한국도 적성국가로 지정 받을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도 미국의 추상같은 경제 제재의 희생물로 전락할 수 있다.
북한이 이미 가면을 벗었는데도 막무가내로 북한 편들기만 한다면 국민이 총궐기하여 그런 정권을 축출(逐出)하는 길 밖에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