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월동주’란 옛 중국에서 서로 적대국인 오(吳)와 월(越)나라 사람들이 같은 배에 타고 있다는 뜻의 4자 성어(成語)이다. 망망대해(茫茫大海)의 한 가운데에서 서로 같은 배를 타고 있으니 우선 급한 일에는 협력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기회만 있으면 상대를 해치울 기회를 호시탐탐(虎視眈眈) 노리고 있는 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6월 12일 북한 핵 폐기문제를 둘러싸고 같은 배에 탄 것처럼 웃으며 악수하고 서로 껴안기 까지 했다.
그러나 이 포옹(抱擁)이 사기극에 불과하다는 것은 아는 사람의 눈에는 처음부터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 문제는 합의문 중에 표현된 ‘한반도의 비핵화’라는 낱말이다.
이것은 원래 북한이 줄기차게 부르짖어 온 전략적 용어이다. 이 낱말에 깔린 저의(底意)를 모르는 한국 사람은 이제 거의 없을 것이다. 북한은 그들이 핵을 보유하게 된 이유로 주한미군의 핵무기에 대항하기 위한 생존 수단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니까 한반도를 비핵화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핵을 폐기하기에 앞서 먼저 주한미군이 철수하고 한. 미 동맹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한반도 비핵화’ 개념을 미국이 받아들인 것처럼 된 것이 현재 진행중인 미. 북 협상의 모양새이다.
미국은 스스로의 간을 빼 주는 것 같은 멍청한 양보를 한 것이다.
본래 북한의 핵은 유엔 안보리의 결의에 따라 국제법상 불법이며 미국의 안보에도 중대한 위협이 되기 때문에 무조건 폐기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끝까지 고수했어야 한다. 지금은 북한에 대해 경제적 제재를 가하고 있을 뿐이지만 만약 북한이 순응하지 않을 때에는 군사적 응징조치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중차대한 문제이다.
이런 엄중한 사항이 어찌 된 영문인지 크게 바뀌어 북한이 오히려 큰 소리를 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북한은 미국이 단계적으로 우선 종전선언부터 하고 앞으로 미군철수
까지 약속하지 않으면 한 발작도 나가지 않겠다는 기세이다.
우리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묻고 싶다. 트럼프 대통령은 과연 ‘한반도 비핵화’라는 북한 식 용어에 앞서 말한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고 서명을 했는가, 모르고 서명을 했는가?
지난 5일 한국 측에서 북한에 파견했던 고위급 대표들이 돌아와서 보고한 바로는 북한은 이미 풍계리 핵실험장과 동창리 미사일 엔진 실험장을 폐쇄했다며 이에 대응해서 미국은 ‘종전선언’에 동의해야 한다고 우기고 있다고 한다.
이 자체가 벌써 말도 되지 않는 주장이다. 북한은 이미 당 전원회의에서 북한이 모든 핵 실험과 미사일 실험을 완성한 핵 보유국이 되었음을 선언하고 이에 따라 앞서 말한 두 실험장도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북한은 무용지물을 없앴을 뿐인데 미국 보고는 그 대가로 종전선언을 하라고 강요한다.
말로는 종전선언은 국제법적 실체가 없다고 하지만 우선 당장 주한 유엔군 사령부는 해체되어야 하고, 미군 철수 문제를 놓고 한. 미간에 균열이 생길 가능성도 커지게 마련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가능성을 알고도 싱가포르에서 김정은에게 구두로 종전선언을 약속했는가?
최근에 불거진 우드워드 기자의 저서 ‘공포(Fear)’에 의하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에도 주한미군의 가치에 대해 회의감을 표하고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 전에 ‘주한미군 전면 철수’를 지시하려 했으나 존 켈리 비서실장 등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왜 미국이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에 주둔시키며 많은 돈을 써야 하느냐고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이다. 당시 켈리 실장은 “대통령은 바보(idiot)다. 내가 나라를 구하고 있다”고 측근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 때 매티스 국방장관도 “알래스카에선 15분 걸리는 북한 미사일 발사 감지를 주한미군은 7초 안에 할 수 있다”며 함께 말렸다고 한다. 화가 난 매티스 장관은 회의를 마친 뒤 측근들에게 “대통령의 행동과 (국제사안에 대한) 이해도가 국민학교 5, 6학년 수준”이라고 불평했다는 것이다.
우드워드의 저서가 아니라도 우리는 이미 트럼프 대통령의 한국문제에 관한 조잡한 인식도를 그의 후보 시절의 연설을 통해서도 익히 알고 있다. 그는 “만약 북한이 (남한을) 공격해 오면 그 것은 너희들끼리의 일이다, Good luck!”라고 말했다.
너희들 끼기 잘 해 보라니, 트럼프 대통령은 본시 한. 미 군사동맹 같은 것은 필요 없고 집권하면 없애겠다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인 것이다. 지금도 그는 극악한 인권 유린 과 근친 살해 경력을 지닌 김정은에 대해 “나는 그를 좋아하고(I like him), 그도 나를 좋아한다…나를 믿어주니 고맙다”고 말하고 있다. 낯 뜨겁지도 않은가? 미국에 엄존하는 숭고한 국격의 견제가 없었다면 그는 벌써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 소름이 끼친다.
한편 김정은과 문재인 대통령은 온 힘을 다 해 종전선언의 성취를 위한 광범위한 공작을 집요(執拗)하게 펼치고 있다. 그들은 종전선언은 그저 한국, 북한, 미국 그리고 중국도 합친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선언서에 서명하기만 하면 간단히 끝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어림도 없는 일이다. 6.25 전쟁은 3년을 끌고 600만 명 이상이 죽었다. 한 반도 전체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역사상 유례가 드문 대 학살이 감행된 이 어마어마한 전쟁에 대한 국제법상 책임과, 아직도 남아 있는 국군 포로문제 등 전후 처리 문제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그저 말 한 마디로 종전선언만 하면 된다는 발상 자체가 하늘 아래 둘도 없는 무책임한 폭거이다. 종전선언이 이루어지려면 최소한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폐기하고 전쟁범죄에 대한 속죄(贖罪)의 뜻을 어떤 형태로라도 사전에 표시하기 전에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6.25 참전용사의 한 사람으로서 소리 높이 외치는 바이다.
지금이라도 한국과 미국은 북핵 폐기 사기극을 즉시 중단하고 원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유엔 안보리의 결의에 따른 북핵 폐기를 관철할 때까지 국제적 결속을 더욱 강화해 북한을 최강도로 압박해 나가는 길만이 정도(正道)요, 가장 현실적인 북핵 해결책이라는 것을 모두가 다시금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