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갑작스런 대통령 출마 포기선언은 근래에 보기 드문 충격파를 한국민들에게 던졌다. 그는 지난 1월12일 귀국한지 꼭 20일만에 대통령 당선의 꿈을 접고 불출마 선언을 하고 만 것이다. 귀국 당시만 하더라도 반 전 총장은 공항에 내리자마자 그의 ‘굳은 결의’를 여과(濾過)없이 기자들에게 피력했다. “정권 교체가 아니라 장치 교체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선언하고 “저는 이 분열된 나라를 하나로 묶어서 세계 일류 국가로 만드는 데 분명히 제 한 몸을 불사를 각오가 되어 있다”고까지 다짐했다. 그렇다면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해도 이번 불출마 선언은 너무나 당돌하고 어이없는 결정이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 같다. 이 인간세상에서는 쉽게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하물며 반 전 총장이 하고자 결심한 것은 ‘분열된 나라를 하나로 묶어서 세계 일류 국가로 만드는’ 크나 큰 일이 아니었던가? 한 사나이가 ‘몸을 불사를 각오로’ 이런 큰일을 결심했다면 적어도 수년간만이라도 이(齒)를 악물고 견디어 보았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 큰 결심을 불과 20일 만에 헌 신짝처럼 손쉽게 내 던지고 손을 턴다는 것은 아무리해도 가벼운 처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성명에서 밝힌 사퇴 원인은 주로 한국 정치 현실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감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저의 순수한 애국심과 포부는 인격 살해에 가까운 음해, 각종 가짜 뉴스로 인해 정치 교체 명분은 실종되고 오히려 제 개인과 가족, 그리고 유엔의 명예에 큰 상처만 남기게 됨으로써 국민에게 큰 누를 끼치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일부 정치인의 구태의연하고 편협한 이기주의적 태도도 지극히 실망스러웠고 결국 이들과 함께 길을 가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판단에 이르게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한 마디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반 전 총장이 이번에 급히 귀국한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바로 이런 정치를 바로잡는 ‘정치 교체’를 하기 위해 돌아왔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이런 정치 교체를 이룩하려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5년 또는 10년이 걸릴 것이라는 것은 삼척동자(三尺童子)라도 알 일이다. 또 한국 정치의 진흙탕과 같은 현실이 어느 정도까지 악화되어 있는지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정치를 개혁하겠다고 뛰어들었다가 뒤늦게 깨달은 것이라면 그 자체가 크나큰 결격사유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반 전 총장이 이번에 쓰라린 고배(苦杯)를 마신 가장 큰 원인은 그가 한국 정치의 진짜 실상에 대해 아무런 개념도 없이 덤벼든 점이었던 것 같다. 도대체 반 전 총장이 파악하고 있는 한국 정치와, 실존하는 냉혹한 현실 사이에 얼마나 큰 거리가 있는가를 그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결정적인 실수는 그가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내세운 점이다. 물론 손학규 씨가 비꼬았듯이 그것은 ‘뜨거운 얼음’이라는 말과 똑 같은 ‘모순된 개념’이라는 평면적 비판도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재의 분열 상태가 단순한 진보와 보수라는 구시대적 이념 사이의 대립이라고 인식하고, 자기가 나서면 모두 휘하(麾下)에 아우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부터가 우리나라 현실을 한참 잘 못 인식하고 있는 증거이다.
우리나라의 진보 대 보수의 대립은 단순한 이념적 분열이 아니다. 그 배후에는 용공분자들의 지하조직 책동과 결부된 체제 전복 흉계가 얽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반 전 총장이 몰랐다면 그야말로 그가 스스로 말한 대로 너무 ‘순진’했던 것이다.
그의 20일 동안의 여론 몰이 행각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국내의 모든 정치세력이 그의 전 유엔 사무총장이란 후광에 습복(?伏)할 것이며, 따라서 친 문재인 세력 외의 모든 당파들을 쉽게 통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했던 것 같다.
이 같은 반 전 총장의 행각은 특히 50~60 대 이상의 골수 자유민주주의 수호 세력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하루에 영, 호남지방을 교차 방문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봉화마을을 찾는가 하면, 촛불시위에 자기도 기회를 보아 참여할 생각이라고 까지 말했다. 그는 곧 잘 못을 깨닫고 “촛불시위가 변질되어가고 있다”고 얼버무리려 했으나 골수 보수세력들의 진노(震怒)를 달래지는 못했다.
반 전 총장의 가장 큰 결점은 그가 일생을 외교관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더욱이 일부 해외언론에 의하면 그는 역대 유엔 사무총장 중에서도 가장 낮게 평가되고 있다는 평도 있다.
여기에 곁들여 반 전 총장이 구체적인 정치 구상 발표를 차일피일 미룬 것도 큰 실수였다.
무엇보다도 정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강력한 권력의지가 있어야 한다. 물론 그 권력의지는 단순한 권력 욕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보다도 가장 앞선 세계관과 나라를 구원할 수 있는 탁월한 현실 정치적 프로그램을 가다듬고 거기에서 우러나는 강렬하고도 희생적인 사명감이 피부로 스며들어 자연히 국민들을 감동시켜야 한다.
여론조사상의 지지도의 오르내림도 궁극적으로는 그의 정치적 이념과 자세에 대한 국민의 평가가 반영되는 것이다.
귀국 당시만 하더라도 반 전 총장의 지지도는 문재인 씨와 엎치락뒤치락했으나 20일 동안에 급속도로 떨어져 문 씨의 반 이하가 된 것이 반 전 총장에게는 직접적으로 가장 큰 심적 타격을 준 것 같다. 반 전 총장은 이를 적대적인 언론의 탓으로 돌리고 그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 기자들에게 “이 나쁜 놈들”이라고 했다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참으로 비참한 말로라 할 수 밖에 없다.
아무튼 반 전 총장의 도중하차로 보수세력들은 또다시 구심점을 잃은 상태가 되었다.
여론조사 상으로는 황교안 대통령권한대행이 2위로 뛰어오르기는 했으나 실지로 권한대행을 사퇴하고 후보가 되기까지는 여러 가지 난제들이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 목숨을 걸고 지향해야 할 것은 철통같은 자유민주주의 수호자를 대통령으로 골라내는 일이다.
중도(中道)보수 후보까지도 참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잘 못 돼도 속마음이 의심되는 좌경세력은 안 된다. “탄핵이 기각되면 다음에는 혁명 밖에 없다”고 막말하는 따위의 사람들에게 정권이 넘어가도록 하는 일만큼은 절대로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